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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27 광해 중립외교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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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나라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중립외교가 필요하다.
타국을 이해관계를 넘어 지원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해의 중립외교가 현재 사드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것이 많아질 것 같다.
교육, 의료, 주택문제를 방관해서도 안되겠다.

출처https://ko.m.wikipedia.org/wiki/광해군의_중립외교
광해군의 중립외교

광해군은 즉위한 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光海君-中立外交)라고 한다. 뒤에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배경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재위한 다음 타계했으며, 1608년에 세자 광해군(光海君, 1608~1623)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광해군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대외 정책광해군 때의 정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대외정책이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한층 쇠약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만포진 건너편 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흥경노성을 근거로 하여 주변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더니, 1616년(광해군 8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고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1618년에는 푸순(撫順)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했다.명나라는 큰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다. 도원수 강홍립(姜紅立)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었고,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毛文龍)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假島)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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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남구
출판 : 시문학사 200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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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eoda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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