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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09 인조반정. 친명배금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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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데
국민이 주인이라면 이제는 지켜만 보고 있지말고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입을 열어야 할 것이다


출처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601&tabId=03&levelId=hm_099_0020
인조 반정과 친명 배금 정책


이 사료는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한 직후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폐위하면서 반포한 교서의 일부이다. 교서에서는 광해군을 폐위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그 중 외교 사안에 대한 부분을 옮긴 것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이르러 동아시아 정세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명나라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하여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며, 대외 관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특히 황폐해진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양전 사업과 호적 정리를 실시하였다.

광해군은 중국에서의 변화에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취하였다. 후금이 명을 압박하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여러 구실을 대며 출병을 피하였으며, 출병하더라도 압록강 주변에서 과시만 할 뿐 힘을 행사하진 않았다. 1619년(광해군 11년) 명의 요청으로 1만여 명의 군사를 원병으로 보냈는데, 도원수강홍립(姜弘立, 1560~1627)에게 명나라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라 하였다. 출병하여 형세를 관망하여 향배를 정하도록 밀령을 내려, 명의 요청을 들어 주면서도 후금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게 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서인 세력은 1623년(인조 1년)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를 왕으로 옹립한 정변을 일으켰다.인조 정권은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이라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무렵 강성해진 후금이 조선에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를 해 왔으나 응하지 않자, 1627년(인조 5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의주⋅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하였다. 그러고는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인조정권은 이를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하였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金尙憲, 1570~1652)⋅정온(鄭蘊, 1569~1641)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광해군이 강상(綱常)의 윤리에 어긋나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했다는 것이며, 이들은 집권 후 이러한 성리학적 명분론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는 대외적으로 주자(朱子, 1130~1200)의 존화양이(尊華攘夷)적 명분론에 입각한 친명 배금(親明排金)의 외교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명분론에 입각한 대내외적인 정책 고수는 청의 발호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 대처 능력을 상실하게 했고, 마침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초래하게 하였다.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며 오랑캐로 여겼던 청의 무력에 굴복하게 되자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의 자부심은 큰 상처를 입었다. 뒤이어 명나라가 오랑캐인 청나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기존의 국제 질서가 붕괴해 버리자 명에 의존하던 조선의 정통성은 크게 손상 받았다.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대내외적 질서를 확립해 가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적 중화 질서의 붕괴를 천지 대란으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사상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을 새로운 국제 관계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주화론(主和論)은 배제되고 종래의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이 국론이 되면서 조선 성리학은 더욱 강고한 명분주의의 틀을 고수하게 되었다. 이는 청에 굴복한 현실을 관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 억류되어 있다 귀국해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 재위 1649~1659)과 그에 의해 발탁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중심으로 한 서인 정권의 정통성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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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남구
출판 : 시문학사 200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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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eoda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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